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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행동

인도 여행: 지도 밖 행군

by Doer Ahn 2011. 1. 3.


프롤로그. 천부지도(天附之道). 하늘이 내려준 길.

인도 여행을 마친 후, 본격적인 숨 고르기와 가슴 펴기를 하기 위해 부산의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 여느 대관집입구처럼 크고 화려한 명패가 달려 있는 건 아니지만, 이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 금새 내 어머니의 향기를 맡을수 있다. 태아적부터 늘 함께 한 사람의 향기..그리고 그 느낌..조악한 공사가 남긴 콘트리트 바닥의 좁은 틈새. 어머니는 그 틈에 거름을 집어 넣고, 씨앗을 심어 이 친구들을 기르고 계신 것이다. 우리집이 이 동네로 이사오기 전, 동네에서 이런 식으로 화초를 기르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를 두고 기적같은 일이라며 입을 모으신다. 콘크리트 바닥 틈새에 씨앗을 뿌리는 일. 처음엔 다들 아무 신경도 안 썼겠지.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하지만 내 어머니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한 곳에서,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들을 가꾸어 내셨다.


인도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더욱 더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깨닫는다. 


인도 여행을 돌아보면, 이 기이한 일련의 사건들을 무엇으로 다 설명해내야 할지 알기가 힘들다. 그저 그렇게 순리대로 흘러가버린 것을 내가 너무 과하게 반추하고 있는건 아닌지...이렇든 저렇든 앞으로 긴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루 다 소화해내기 힘들 경험들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2010년 말에는 중국 여행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본 한 편의 영화. '세 얼간이'는 내 오랜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영화를 본 후, 나는 당장 인도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그리고는 영화를 한 번 더 봤다. 마음 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도라는 나라의 문화와 정서 그리고 영화 산업을 알고 싶다'

그리고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1. 힌두어를 배우자.
2. 도시개발 및 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하자.
3. 볼리우드 영화에 엑스트라 출연하며 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자.

2010년 11월 22일, 나는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꼭지 하나. 카쉬미리, 스리나가르.

그.러.나. 인도에 도착한 후 처음 맞이한 날 아침. 나는 사기를 당했다. 현지 여행사에게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사기를 당했다. 힌두어를 배우겠다는 목표의식에 눈이 어두웠던 나는 완전 타인인 것처럼 생각되던 두 사람이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그러나 같은 말로 '힌두어를 배우겠다면 카쉬미리주의 스리나가르라는 곳이 최고'라고 내게 사기친 것을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 사기극의 전모를 스리나가르에 도착한 후에 깨달았다. 스리나가르의 인구 98%는 힌두교인이 아닌, 무슬림이고 그들은 힌두어가 아닌 카쉬미리어를 일상어로 사용한다. 또한, 스리나가르에서 머물게 된 게스트하우스 주인들은 그 지역 여행사의 소유주들이었으며, 그들은 나에게 매우 강압적인 태도로 더 많은 여행 패키지를 팔 생각만 골똘이하는 악당들이었고, 델리의 여행사와는 한통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도, 힌두어만 사용하는 사람이, 다행스럽게도, 한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하루 2달러 미만의 임금으로 생활하는 절대빈곤층 요리사였다. 그의 아내와 두 아이는 제대로 지급조차 되지 않는 임금 탓에 생활고에 버거워한 끝에 그 집에서 도망친 상태였고, 홀로 남겨진 그는 하루 하루 힘들어하며 그 집에서의 중노동을 견뎌내고 있었다. 이에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밤마다 나의 다락방으로 올라와 힌두어를 가르쳐 달라. 그 동안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찾아 보겠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날 밤부터 우리는 온 몸으로 서로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가 영어를 못하고, 내가 힌두어를 못하니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디랭귀지 뿐이었다. '나'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손바닥으로 심장을 툭툭 쳤는데, 그것을 '답답하다'로 해석하거나, '맡겨줘'로 해석하는 등 잘못된 소통도 꽤 많아 본격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기 까지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후에 깨달은 건, 그 당시 언어를 배우는데 그 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 같다. 표정과 몸짓을 중심으로 표현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인도인들 특유의 감성적 표현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배우게 된 것이다.

날이 밝으면 나는 여행사 사기꾼들의 지독한 통제를 벗어나 은행, 파출소, 우체국, 국영 여행자 센터, 관공서 등을 찾아다니며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여성'을 찾기위해 혈안을 올렸다. 그렇게 보낸지 약 5일. 나는 결국 관공서 직원에게 뇌물을 주고, 빈민층들을 위한 복지 센터를 소개 받았고, 그곳에서 여성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얻은 후, 그녀가 아직 스리나가르에 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졌고, 다시 그녀를 찾아 다녔다. 그렇게 약 이틀을 더 보낸 후...내가 그녀를 찾아낸 곳은 군부대였다. 그녀는 그곳의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집으로 돌아와 요리사와 그녀가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그날 밤 식당을 예약해서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현금의 대부분을 그들에게 남겨둔 채 그 집을 도망치듯 떠났다. 남겨진 그들이 앞으로 똑같은 굴레의 삶의 살게 될거라는 걸 직감하는 나를...자책하면서...


꼭지 두울. 라다크, 레.

카쉬미리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은 극심한 한파로 인해 모두 막혀있었다. 그래서 나는 동쪽으로 가는 가장 먼 목적지를 찾았고, 사람들의 추천은 '라다크(Ladakh)' 지역의 '레(Leh)'라는 고대 도시였다. 스리나가르에서 레까지는 약 500킬로미터 거리로 서울-부산 여정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이는 그와는 비교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천만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중간에 경유하는 '조우질라'라는 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겨울 도로 중 한 곳으로 손 꼽히는 곳이고, 목적지까지의 순수 운전 시간은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레. 그곳에 도착해서는 곧장 관공서부터 찾아가 나의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자원봉사기관이나 NGO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내가 봉사할 수 있는 일을 해주고, 필요하다면 비용도 지불하면서, 대신 힌두어를 배우며 숙식을 제공 받고 싶다.' 관공서 직원은 미소를 띄우며 내게 근처 기관들 이름과 연락처를 몇 개 적어 주었다. 접선 끝에 그 중 최종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곳이 SECMOL(The Students' Educational and Cultural Movement of Ladakh). 이 곳은 라다크 지역의 교육 문화 부흥 운동을 위해서 설립된 학생자치형 대안학교다. 나는 SECMOL에서 교육 봉사를 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그들이 추진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판단했다. 

이 곳에 머물면서 천천히 알게된 사실 세 가지. 하나. 이 캠퍼스 캡틴 부부가 나를 인도에 오게 만든 영화 '세 얼간이'에 엑스트라 출연을 했었다는 것. 두울. SECMOL 캠퍼스는 '세 얼간이'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상적인 학교의 모델이었다는 것. 세엣. 영화 '세 얼간이'의 마지막 촬영 지역 대부분이 이 곳 라다크 지역이라는 것...

이에 나는 이 지역에서 영상을 찍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영화 '세 얼간이'의 한 요소가 된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한류 드라마 열풍으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국의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하는 현상을 내 몸으로 직접 이해한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그 곳에 머무는 동안 수많은 변화와 도전을 겪었다.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잔혹한 추위는 손발의 신경을 무디게 했고, 압착 마스크를 3겹 정도 끼고 사는 듯한 느낌을 주는 희박한 산소량은 10걸음만 빠르게 걸어도 남산을 19분만에 뛰어 올라가는 것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 도전은 의외로 극복하기 쉬운 것이었다. 매일 밤낮으로 산을 오르고, 축구와 아이스 스케이팅에 참여하며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하니, 이내 고통은 사라졌다. 그러나 눈 앞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크기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밤 하늘의 어둠을 모두 덮어 버리려는 기세로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볼 때면, 그런 육체적 적응과는 관계없이 거대한 그리움과 허무함이 밀려왔다. 거대한 자연 속의 작은 나..머리 속을 뿌옇게 채우고 있던 지식들이 모두 증발해 날아가고, 온 몸으로 느끼는 감성만이 원석처럼 빛나는 느낌.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경험. 자연은 나에게 거대한 깨달음을 선물해주고 있었다.

자연 속에서 명상적 삶을 추구하는 동시에, SECMOL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쳐 주었고, 라다크 지역 사회와 지구가 직면한 도전에 대해서 자주 강연했으며, 그들의 태양열 활용 기술과 방법론에 감탄하며 새로운 배움과 실행을 추구했다. 또한, 한 지방에 모여서 화합하고 있는 다양한 종교들-이슬람, 불교, 힌두교, 기독교-을 두루 이해하기 위해 매일 밤 촛불을 밝혔다. 처음부터 배우고자 했던 힌두어는 물론이고, 라다크 지역의 현지어인 라다키를 배우기 위해서도 적지 않은 시간을 집중했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 이상적인 듯 보이던 그들의 삶도 이해와 깊이를 더해서 바라보니, 곪아있는 현실의 상처들이 많았다. 절대빈곤. 현대화의 병폐. 환경오염..나는 그 문제들을 조명하기 위해 그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고, 급기야 소규모로 TEDxLeh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한국에서도 이들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훌륭하게 이어 나가는 일인 듯 보였다.


꼭지 세엣. 델리.

스리나가르와 레에서의 힌두어 학습. 그리고 라다크 현지어 학습. 또한 라다크 지역 개발 및 디자인 프로젝트 참여. 다큐멘터리 촬영 및 TEDxLeh 컨퍼런스 개최.

이런 방식으로 인도에 오기 전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들에 작은 발걸음을 내디딘 후, 자연 속에서 그리움과 허무함을 깨달은 나는 볼리우드 영화 출연 목표의 맹목성에 회의를 품으며 귀국을 결심했다. 또한, 이곳에서 얻은 경험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가능한 삶의 연장선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겨 모든 일을 재촉하지 않고,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귀국을 위해 델리로 돌아 온 첫 날. 좋지 않은 기억이 있던 델리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곧장 공항으로 가서 항공 티켓을 가장 빨리 출발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귀국행 비행기는 다음 날 밤 10시. 이후 곧장 빠하르간지의 한 한국인 식당으로 향했다. 한국어로 넋두리를 풀며, 함께 소주 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을 간절히 찾고 싶었다. 그 간절함은 아직 한 가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마음 속 후회 때문에 더욱 커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 사건이 발생했다. 식당에 도착해 소주를 마시고 있던 늦은 저녁 시간, 한 인도인 여성이 굉장히 평범한 차림으로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다음 날 볼리우드 영화에 출연할 동양인 엑스트라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 순간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이건 분명 신종 사기 수법이다.'

그 여성이 다음 날 아침 일찍 차를 가지고 태우러 올 것이며, 멀리 이동해서 촬영할 것이라고 말하자 우리의 의심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

'이건 분명 납치 의도이거나, 멀리 가서 내려준 후 차비와 추가 비용을 청구하는 식의 여행사 사기일거야.'   

... 그러나 ... 나는 그 의심과 두려움의 바다 한 가운데서 이 여성을 따라 가야한다는 거대한 울림을 느끼고 있었다. 맹목적인 목표 의식 때문이었을까. 취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감각이 작용한걸까. 나는 어떻게 되든 일단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me! Me! ME!!!!!'를 외쳤다.

그날 밤 나는 짐을 단단히 싸맸고, 아침에는 이를 몸에 단단히 고정시킨채, 일찍부터 그녀를 기다렸다. 마음 속 한 편으로는 그녀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던 것 같다. 그저 이 하루가 무사하고 무난하게 지나가길 바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그녀는 지프 차를 몰고 와서 나를 승차 시켰으며 다른 외국인들을 몇 명 더 태우더니 차를 빠르게 달렸다.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나는 문 쪽에 앉아서 고리를 잡고,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언제든지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차는 멈추었다. 그 곳은 델리의 유명한 관광지 '후마윤 묘' 앞이었다. 나는 이것이 적어도 납치는 아니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투어비를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여전했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몇 걸음가지 않아, 의심은 모두 사라졌다. 거대한 촬영 장비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는 모습. 스탭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 영화 촬영 스탭들을 위한 야외 부페...

한 차례의 엑스트라 출연을 마친 후, 너무나도 신난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스탭에게 내가 인도에 온 연유를 설명하며 이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를 말했다.

나: '난 원래 중국에 갈 계획이었는데, 3 얼간이라는 영화를 보고 티켓을 인도행으로 바꿨어'
스탭: '오~그래? 그 영화 몇 번이나 봤니?'
나: '음...4번 이상 봤지!'
 
스탭: '하핫. 고마워! 그 영화 우리가 만들었거든!'
나: '.... .....??..... !!!!!!!!!'

그 순간 나는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전율과,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생전 처음 느껴 보았던 것 같다.

... ...

촬영 직후 나는 델리 공항으로 향해, 한국으로 귀국했으며, 비행기 안에서 한편으로는 한국의 모두에게 이 일을 알리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도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을 되뇌이며 또 다시 흥분과 감동의 큰 한숨을 쉬어야 했다.


에필로그. 자기지도(自己之道). 스스로 선택해서 가는 길. 지도 밖으로 행군한다는 것.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작은 인맥 조차 없었지만, 나는 마음 속 결심 하나로 인도로 향했고, 인도 땅에 어떤 하나의 점을 찍고 돌아왔다. 여행사나 선배 여행자들이 제시하지 않거나, 못하는 세계들. 남들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하는 상식들. 모두가 이.렇.게. 걸어가야 한다고 할 때, 속는 셈치고 저.렇.게. 한 번 걸어 볼 때. 어쩌면 우리는 그곳에서 무한한 가능성과 새로운 경험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도 밖으로 행군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내 마음의 지도 안에서 남들이 그려준 부분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과감하게 자기 길을 한 번 만들어 보는 것.

이는 작년 11월에 떠났던 '겨울의 일본, 자전거 여행 - 일본의 장인을 찾아서'에서도 충분히 느꼈던 바다. 나와 친구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전거와 건강한 몸뚱아리만 가지고 일본으로 떠나, 얼마나 많은 우연과 감동 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얻고 왔던가. 우리는 온 몸을 불확실성에 내던지고 도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누구도 만나보지 못했던 일본 장인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깊이있게 놀자.

대담하게 하자.

 자기답게 살자.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세상을 디자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