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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행동

[Doer] 몸을 시리는 건 바람이고, 마음을 시리는 건 사람이다. - 인도 사회의 부자연스러운 경제

by Doer Ahn 2010. 12. 5.


히말레야 산맥.

이곳의 건조함과 추위, 그리고 고산의 희박한 산소는 밤마다 몇 번이고 나를 깨게한다. 포근한 잠을 잤던 기억 자체가 가물가물하다. 모포를 몇 곂씩 두르고 자더라도 모포와 발이 함께 얼어붙는 느낌이다.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면, 딱딱한 이불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로써, 내 발에 감각이 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 온수, 난방 시설이 모두 희소한 이 지역의 겨울은 온 몸을 시린다.

어젯 밤 12시 30분 경엔, 추위에 부르르 떨며 일어나 옥상에 올라가 별을 올려다 보았다. 희안하게도, 이 밤엔 어둠이 없다. 이 밤엔 거대한 달 덩어리와 헤아릴 수 없는 별들만이 수놓여 있다. 지나 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가족들과 친구들이 너무나도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내 몸을 시리게 한 바람은, 오히려 마음에는 따뜻한 영양분이 되어 준 것같다. 고맙다.

하지만 스리나가르에서 나에게 힌디어를 가르쳐주던 한 친구 생각에 미치자, 다시 마음이 시리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내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의 요리사였고,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그를 개, 소와 비슷한 하인처럼 취급했다. 그는 밤마다 3층 다락방인 내 방으로 올라와 온 몸으로 힌디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영어를 못했고, 나는 힌디어를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몸으로 소통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에게 힌디어를 배우게 된 사연은 좀 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델리에 도착했던 둘째 날. 나는 한 인도인으로부터 '힌디어를 배우고 싶다면 스리나가르가 최고'라는 조언을 얻었고, 그 길로 그가 소개해준 여행사를 통해서 스리나가르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온전히 사기였다. 스리나가르의 인구 98% 가량은 무슬림인데다가, 그들은 힌디어가 아닌 카쉬미리어를 구사했다. 힌디어는 학교에서 제 2외국어 배우듯이 배우는 실정이었다.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지역 여행사 사장이었고, 그는 델리의 여행사와 완전히 한통 속이었다. 끝없이 무언가를 팔 생각만 하는 장사치에 다혈질이었다. 

나는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았고, 되돌리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처한 상황 안에서 최선을 얻고자 결심했다. 수도에 정진하는 마음으로 임한 몇 일. 그러던 과정에서 알게된 사실은, 그 게스트하우스에서 힌디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개, 소와 비슷한 취급을 당하고 있던 요리사였던 것이다. 나는 그와 짧은 몇 대화를 나누고는 바로 그와 함께 밤마다 힌디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짧은 영어로 내게 설명했던 말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You. Come Here Five Days. They. No. Money. Give Me. No Money"
나. "Why?" 
그. "No. No. No. No Money. My Wife. Go(손가락으로 도망가는 표시를 하면서). They Give No Money"
나. "How much do you get paid per month?(이 문장을 이 친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온갖 그림과 몸짓을 동원했다)"
그. "3,000 Rs(3,000루피 = 하루에 100루피. 즉, 그는 하루에 2,400원을 번다)"

수 십분 간의 대화 끝에 알게 된 것은, 그는 원래 남쪽 지방 출신이고, 결혼 후 와이프와 아이가 둘 있다는 것. 그들은 이 집에 들어와서 요리사와 청소부 등 하인 생활을 했지만,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와이프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이 게스트하우스가 손님들에게 보통 하루 1,350루피~2,250루피 비용을 받고 숙박을 제공하는가 하면, 하루 2,300루피에 달하는 고액의 트레킹 패키지를 사기 및 강매 형식으로 팔고 있는 걸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매일 나에게 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값싼 트레킹을 팔려고해! 이건 비즈니스가 아니야! 사회적인 일이야!"

나는 곧장 요리사에게 매일 밤 내 다락방으로 올라와 힌디어를 함께 공부하기를 제안했고, 그 조건으로 와이프와 아이들을 찾는 것을 도와주고, 보수를 얹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와 함께 보냈던 매일 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에겐 슬픔과 희열이 공존했다. 해가 떠오르는 게 싫었다. 아침이 밝으면 낮동안 게스트하우스의 장사치들과 함께 거짓 웃음을 지으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나는 그들의 비즈니스, 그리고 네트워크를 깊숙히 그리고 온전히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이제는 많은 증빙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레로 떠나오기 전 날, 나는 이곳 저곳 수소문 끝에 그의 와이프가 있는 곳을 찾아냈고, 그들이 통화하고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극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그가 와이프와 떠날 수 있도록 보수와 팁을 주었고, 그는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에 무스를 바른채, 연신 벙긋벙긋 웃으며 내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돈만이 그를 바꿀 수 있는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더 많은 돈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인도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델리에 도착했던 첫 날. 프리페이드 택시로 내가 지불했던 비용은 300루피였다. 하지만 그 택시 기사의 하루 일당은 150루피다.

게스트하우스를 거쳐갔던 우크라이나 친구들, 캐나다 친구, 이스라엘 친구가 하루 숙박비로 지불한 평균 비용은 약 1,700루피에 달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를 가장 가까이서 보살펴 주던 친구는 하루에 100루피를 번다.

괴이한 불균형이었다. 나는 그 곳 환경의 변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으나, 끝내 답을 찾지 못한채 등을 돌렸다. 개인적으로 큰 상실감 같은 게 밀려왔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 간단한 웹사이트 구축과, 블로그 및 페이스북 운영 방법 등을 알려주기로 하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숙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들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잠시간 죄책감을 느꼈지만, 한 친구의 말에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만약 사기 비즈니스를 하는 그들에게 네가 그런 것들을 알려줬다면, 더 큰 죄책감을, 더 오랫동안 느끼게 되었을거야"

나는 인도에서 생활하며, 무언가를 소비할 때, 버릇처럼 요리사 친구, 모빈을 떠올린다.

와이프랑 자식들은...함께 살고 있을까..

차가운 바람은 견딜만하지만, 사람에 대한 시린 기억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어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